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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축서사

열여덟 번째-문수산 축서사 ‘쉬고, 쉬고 또 쉬고’ 만나고 싶었다.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더해질수록 만남은 쉽지 않았다. 마침, 지인으로부터 스님의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나는 스님을 만나기라도 한 듯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가슴이 뛰었다. 심장소리가 쿵쿵 머릿속을 걸어 다니며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해만 갔다. 진정한 스승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의 근거가 마음을 끌고 가는 사유의 부재라 해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밥벌이 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한 생애의 진실이 삶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다. 연민은 더욱 아니다. 가난하고 고독한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다만, 몸속의 살아있는 희망일 것이다. 몸이라는 우주에게 희망이라는 마음을 심어주는 스승을 그리워한 나는 그..

물야면 지림사

열여덟 번째-물야면 지림사 나는 한때 한 여자를 알았지. 아니, 그녀가 한때 나를 알았다고 얘기해야 할지도 몰라. 그녀는 내게 자신의 방을 보여주며 말했네. ‘좋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내게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면서 어디에든 앉으라고 말했네. 그래서 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거기에는 의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난 양탄자 위에 앉아서 시름을 잊고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다네. 우리는 두 시까지 얘기했어. 그녀는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해요.’라고 하면서 내일 아침에는 일해야 한다고 내게 말하며 웃기 시작했다네. 나는 내일 일을 안 해도 된다고 얘기해 주면서 잠자리에 기어 들어갔다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홀로였고, 새는 날아가 버렸다네. 그래서 난 불을 지폈지. 좋지 않아? 노르웨이 숲에..

소백산 비로사

열일곱 번째-소백산 비로사 친구는 내가 놀고먹는 줄 안다. 출판사 사무실에 앉아 커피나 홀짝거리거나 출판할 원고를 몇 줄 읽다가 인사동 술집에 앉아 술잔이나 기울이며 신선놀음할 거라고 의심하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출판사 일이란 것이 표가 나지 않는 고도의 정신노동인데 그 정신노동의 강도가 오후 4시경이면 스트레스의 정점을 찍는다. 쌓여있는 원고들이 벌떼처럼 일제히 들고 일어나 나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피할 곳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인사동 ‘생기원’으로 피신해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술을 끊은 지 벌써 여러 달째다. 술벗들도 술 끊어 재미없어진 나를 차츰 멀리하고 있는데 유독 B선생만은 술 끊은 나를 끌고 인사동을 순례하며 술고문을 시키곤 했다. 말은 바..

소백산 백룡사

열여섯 번째-소백산 백룡사 항상 궁금했다. 하필 아슬아슬한 저 깎아지른 절벽에 세웠을까. 보는 이의 불편함이나 걱정도 아랑곳하지 않는 곳에 세운 저 건물이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중2처럼 니들이 뭔 상관이냐는 듯 서서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중앙선을 타고 소백산 죽령터널을 지나거나 중앙선 열차를 타고 죽령터널을 지날 때마다 그래서 나는 늘 더 궁금했다. 바람도 조롱하며 넘는 절벽 사이에 걸쳐 있는 절을 볼 때마다 한 번 꼭 가봐야지 하면서 벼르고 별렀다. ‘세상의 모든 간이역은 다 착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품고 여행을 하곤 했다. 실제로 그랬다. 간이역의 풍경은 그대로 자연이 되어 있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착해서 느린 열차의 뒤꽁무니처럼 무심히 쳐다보아도 그냥 좋았..

미륵산 미래사

열다섯 번째-미륵산 미래사 나는 보다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없는 듯이 살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그 어떤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 지난겨울이 나에게 고마운 것은 이런 결단을 내리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1983년 샘터사에서 나온 법정스님의 ‘산방한담’ 초판이 나올 무렵 나는 우울한 시대의 중심에서 어쩔 수 없는 젊은 날들을 겨우 보내고 있을 때였다. 위태롭고 위험한 세상을 꾸역꾸역 건너며 이념 따위의 고통이 전부인 양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나도 새로워지지 않았다. 별, 달, 꽃, 소녀,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이름보다 혁명, 데모, 운동 같은 이름들을 더 많이 부르며 나의 젊은 날들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렀었다. 물론, 나는 그때의 법정스님을..

소백산 유석사

열네 번째-소백산 유석사 청마, 갑오년 신춘이 찾아왔다. 살아있는 것 이상의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해도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기 그지없다. 신춘이 되면 또 마음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시간이라는 열정에게 빠져 버린다. 누구나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만큼의 가장 빛나는 죄악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그런 인생은 스토리텔링으로 풍요롭게 출렁이고 못된 철학자의 혀처럼 영혼을 매혹시킨다. 해를 넘기면서 정리해야 할 일들이 발목을 붙잡고 놔주질 않아 내내 우울했었다. 질척거리는 우울을 안고 신춘으로 진입해 오고 나서야 나는 갑오년 청마가 찾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작년 티베트에서 돌아오신 나의 스승님은 은비령 깊은 암자로 들어가 삼년 무문관에 들어가셨고 나는 괜히 쓸쓸하고 외로워 아무것도 손에 잡히..